문화 / Culture

[조영주의 성공한 덕후] 2019 제주도 여행 (2) -지금 여기,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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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아침 일찍 산책을 나왔다가 마주친 글 쓰는 손.

 

 

혼자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어딜 가도 혼자서 머무는 게 편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이번 제주도행은 이런 ‘혼자’에서 한참 벗어난 여행이었다.

 

7월 31일, 카페 홈즈에서 열린 ‘백탑파의 밤’에서 사회를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내가 그런 걸 맡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기회가 주어졌으니 넙죽 승낙했다. 이후 나는 집요해졌다. 김탁환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서 이날 밤 사회를 성공리에 마치고야 말겠다는 목적의식이 생겼다. 제주도에서도 그랬다. 김탁환 선생님이 귀찮아 하셔도 무조건 따라붙을 각오로 눈을 부릅뜨고 “애월까지 저도 데리고 가주십시오!”를 외쳤다. (속으로는 거절하실까봐 조마조마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신이 났다. 더불어 또 혼자 진지해졌다. ‘선생님을 모시는데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 일정도 짜고 어디 가서 밥을 먹고 콜택시를 부르고……’ 그리하여 장르문학부흥회가 끝난 일요일 오전, 호텔 로비.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하는 순간, 선생님이 딱 한 마디 하셨다.

 

“일정 짜지 마.”


……이, 읽혔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멍청히 선생님을 바라봤다. 그러자 선생님은 한 마디 덧붙였다.

 

“전문가가 올 거야.”

 

아, 프로패셔널. 이 말에 긴장이 풀렸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후 “네.”를 외친 후 나사를 하나 풀어버렸다. 그랬더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또 ‘암’이었다. 내가 암이면 어쩌지, 나 죽는 건가, 아니야, 갑상선 암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댔어. 완치율이 높다고 했어. 한참 걱정을 하다가 최근 나온 책 한 권을 떠올렸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이 책 제목마냥 사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고민은 우리를 애월까지 데리고 가기 위해 찾아온 강보식 선생님의 차에 탈 때까지도 이어졌다.

 

강보식 선생님은 타인과의 여행에 익숙한 분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내내 적당한 대화와 침묵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나는 덕분에 조금 느긋해질 수 있었다.

 

애월, 목적지인 ‘디어마이블루’에 도착하기 전 시간이 남았다. 강보식 선생은 고산천문대에서 시작되는 올레길을 돌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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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을 걷는 김탁환 선생님과 내 뒷모습 (사진 : 편성준)

 

 

정식으로 올레길을 걷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살짝 들떴다. 잘 걸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작년, 남양주로 이사한 후 거의 매일 개와 함께 동네 주변을 뛰어다녔으니 기초체력은 꽤 될 줄 알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예상대로 흘렀다. 평지는 수월했다. 중간 중간 뛸 여유도 있었지만 산에 오르는 순간 급격히 체력이 떨어졌다.

 

나는 빠른 포기맨이다. 웹툰  『용이 산다』  에서 배운 말이다. 이 웹툰의 주인공 김용은 후회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이든 최대한 빨리 포기한다. 내가 딱 이렇다. 이번에도 나는 재빨리 등산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등산을 싫어했다. 고등학생 시절 전교생이 도봉산으로 소풍을 갔을 때, 꾀병을 부리고 내뺀 적도 있었다. 이런 내가 웬일로 포기하지 않았다. 포위당한 탓이다. 숨이 턱에 차서 “나 그만 돌아갈래!”를 외치고 싶었을 무렵엔 이미 산을 중반정도 오른 상태, 앞에는 김탁환, 편성준 선생님이, 뒤에는 강보식 선생님이 따라오시며 “5분만, 5분만 더 가면 돼!”를 외치며 응원해주시니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뒤따라오던 강보식 선생님은 호흡법도 알려주셨다.

 

“배로 숨을 쉬어봐요! 천천히 크게!”


어라, 이거 낯익네. 복식호흡 아닌가?

 

고등학생 시절 연극반이라 새벽마다 복식호흡을 연습했다. 알고 보니 이 복식호흡이 등산에도 유용했다. 배에 힘을 팍 주고 숨을 쉬려고 노력하자니 머리끝까지 두근거리던 기분이 나아졌다. 주변을 볼 여유가 돌아왔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숲 냄새, 산기슭을 따라 촘촘히 박힌 나무 계단,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모든 풍광의 끝에 다시 하늘을 만났을 때, 절벽을 따라 치솟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을 때,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지금, 살아있군요.”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살아있는 현재보다 죽을지도 모를 미래만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하면 안 된다고 무던히 자신을 달래도 마음 한구석 무의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맞바람을 맞으며 절벽길을 걸으며 나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살아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 라고.

 

나중에 따져보니 이 때 내가 오른 산길은 길어야 10분거리였다. 그 때 잠깐 숨 좀 찼다고 살아있다는 깨달음을 얻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오버도 없다.

 

범인은 바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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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마이블루 창립기념일 파티 풍경 (사진 : 디어마이블루)

 

 

올레길을 돌고 가볍게 식사를 한 후 애월 ‘디어마이블루’로 향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또 제비 뽑기였다. 내가 뽑은 제비엔 이런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보조개, 소울메이트, 여행.

 

창립기념일을 맞이한 ‘디어 마이 블루’에 다양한 사람이 찾아들었다. 권 대표는 이런 사람들이 서로 자연스레 대화를 할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마니또 게임을 제안했다. 이 날, ‘디어마이블루’에 온 사람들은 각기 작은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 이들이 선물을 줄 상대를 찾을 단서가 바로, 제비의 세 단어였다.

나는 참고로 이런 단어를 적어 냈다.

 

170~175 사이, 백내장, A형

 

처음엔 171.3cm, 백내장, A형이라고 적었지만 권대표가 너무 쉬울 것 같다고 해서 제일 첫 번째를 바꿨다. 이후, 나는 누가 내게 선물을 줄 사람인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그 결과, 한 남자분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백내장을 걸린 걸 어떻게 알아! 나이 많은 사람인가? 남자겠지? 아 안 되는데 내 선물 남자용 아닌데!”

 

나는 이 때 대답하고 싶었다.

 

“그거 접니다. 저요, 저요. 무슨 선물인데요?”

 

물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기다렸다. 내 선물이 뭘지, 그리고 내가 찾아야 할 상대는 누구일지. 마치, 셜록 홈즈처럼.

 

명탐정도 아닌데 “범인은 바로 너!” 같은 감이 올 때가 있다. 이 날 내가 그랬다. 나는 직감이 말하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긴 파마머리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녀였다. 술을 못한다고 하자 내게 자두에이드를 준비해줬다. 나는 그녀가 내 마니또 상대이길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했다.

 

내 감은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아니라고 하니 탁 맥이 풀렸다. 추리할 맛이 훅 사라져 잠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 그렇다고 범인(?)찾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후 보조개가 들어가는 사람만 보면 물었다.

 

“저기 혹시, 보조개, 소울메이트, 여행…….”

 

생각보다 보조개 들어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나 자신도 있었다.) 보조개가 들어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물어보고 나니 딱 한 사람, 물어보지 못한 사람이 남았다.

 

붉은 옷의 남자.

 

셜록 홈즈는 말했다. 모든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해보일 지라도 진실이라고. 물론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 기분은 딱 이랬다. 마니또 발표 시간, 나는 유일하게 말을 못 걸어본 붉은 옷의 남자를 내 마니또로 지목했다.

 

결과적으로 틀렸다. 내 마니또는 나에게 자두에이드를 먹으라고 한 그녀, 최초의 감이 일컬은 여자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내 마니또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뜻밖의 범인(?)을 발견한 후 나는 생각했다. 이거, 나중에 추리소설에 써먹으면 어떨까. 자기가 범인인 줄 모르는 살인자. 강력한 반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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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축하 파티를 당했다. (사진 : 편성준)

 

 

생일파티를 당했습니다

 

<채널예스>에 연재하고 있는 ‘조영주의 적당히 산다’ 칼럼에 지난 2월 ‘디어마이블루’라는 제주도 애월의 작은 서점과 어떤 식으로 인연을 맺었는가(정확히는 구제받았는가)에 대해 적은 적이 있다. ( 꽃과 서점을 둘러싼 귀촌 http://ch.yes24.com/Article/View/37857 ) 이 칼럼의 말미에 ‘디어마이블루’와 내 생일이 단 하루차이란 말을 본 권희진 대표는 SNS로 덧글을 달았다.

 

“올해 생일파티 해줄게요!”

 

지나가는 말 정도로 여겼다. 창립기념일을 맞이해 파티를 한다고 하니까 파티에 끼어주겠지 정도로 여겼건만 아, 권희진 대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생일파티를 ‘당했다.’

 

범인 찾기(?)를 하느 사이 펼쳐지는 행사는 즐겁기 짝이 없었다. 마술하는 곰의 마술쇼는 신기했고, 김탁환 선생님의 말씀은 이틀 연속 들어도 그저 즐거웠고, 연이은 공연 역시 흥겨웠다. 유럽의 중세시대 음유시인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제주갑부훈은 이야기와 음악을 오가며 자연스레 자신의 노래를 소개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주갑부훈이 말했다.

 

“오늘 생일인 분이 있어요.”

 

설마 그게 나일까 했는데, 내 이름이 무대에서 울려 퍼졌다.

 

“영주 씨! 사랑하는 영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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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마이블루, 마니또가 준비한 내 선물은 헬로키티 종합선물세트였다! 캐리어 잔뜩 채워 돌아왔다.

 

 

아, 닭살……하는 사이 권희진 대표가 갑자기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커다란 초가 하나 꽂힌 생일 케이크. 나는 케이크를 든 채 무대에 올랐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생일축하를 받고, 소원을 속으로 빌며 케이크의 불을 껐다.

 

그렇게 빈 소원이 지금에 와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의 기쁨은 기억한다.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던 사람들의 미소, 진심으로 축하해주던 다정한 표정. 아마도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애월에서 맞이했던 생일파티, ‘디어마이블루’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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